건담) 더블오의 주제는 서로 마음을 읽는다고 상호 이해한다는 게 아님
본문
데카르트 셔먼만 봐도 연방군 일부 세력은 그를 대화를 통한 이해가가능한 신인류로 보았다기보단 신무기의 파츠로서 이용했음 연방군내 양심파의 대표격인 커티 마네킨이 그를 보고 적어도대위(=인간)으로서 대접해주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그로 인해 데카르트는 ELS를 상대로 해서도 그들이 지성을가지고 있으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으면서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행위를 적대적으로 판단하고거부하며 괴물이나 적으로서 인식했음. 결국 세츠나와 데카르트의 결정적 차이는 세츠나는 그들의 비명을 듣고이해하고 대화하려 노력했으나 데카르트는 그들의 절규와 고통을 이해했으면서도 대화를 거부하고 싸움을 선택했다는것임.
그리고 상호 이해와 대화를 추구한 세츠나 역시 ELS와의 대화를실패하게 됨. 엄밀하게 말해서 데카르트의 비극은 대화에 실패한 그 자체라기보단 상호이해를 위한 이노베이터로서 변혁했으되무력을 위한 도구로 취급받고 스스로도 타인에 대한 불신과 증오, 소통의 거부로 인해 타협이나 설득이 불가능해졌고 자신의에고로 이노베이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함.
한편 극장판에서 세츠나는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인간적으로번민하고 괴로워하던 입장이었으며 중간에 세츠나가 즉흥적으로 시도해봤던 대화나 데카르트 샤먼이 보여준 공격적인 태도나 모두ELS에 의해 실패한다는 점에서 신인류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는 만능키가 아님을 보여줌. 또한 극장판에서 세츠나는신적인 입장으로서 혼자 문제를 해결하거나 무조건 상대방 ELS에게 강압적인 대화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 솔레스탈 비잉멤버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담아 솔레스탈 비잉 멤버들이나 지구연방군의 그라함 에이커 등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받으며 천상의 존재인 ELS와 지상의 인류를 잇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음. 작중 세츠나가 무의식 중에 살아남기위해 모두가 일치 단결하여 각자의 입장에서 세계의 위기에 대응하는 장면을 보고 그것을 후일 ELS가 나타내는 꽃으로형성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세츠나가 마지막에서야 성공한 대화가 단순히 혼자만의 의지가 아닌 전 지구인류의 살아남고미래를 보고 싶다는 입장을 ELS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묘사를 보여준 것임. 그렇기에 세츠나는 이로서 단순히 파괴만을위해 살아갈 뿐인 인생에서 벗어나 이노베이터로 변한 것에서 끝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아를 변혁하여 진정으로 타인을받아들이며 "살아온 가치가 있었다"고 되뇌일수 있었던 것임
이는 더블오에서 끊임없이 나타냈던 주제였기도 함, 한 마디로인간은 인간 내면이 변화하지 않으면 아무리 신인류가 되었다고 해도 그 가치를 제대로 쓸 수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임.데카르트 샤먼이 괜시리 세츠나의 반대편 거울로서 설정된 것이 아니고 아리 알 서셰스의 예를 봐도 그럼. 결국 선구자가 된세츠나 이후 속속 인류가 단순히 이노베이터가 되는 것 만이 아닌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고 변하여 갔듯이 앞으로 인류는대화하고 소통하며 타인과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대화하여 상호이해를 통한 평화를 이룩하는데 방해되는 경솔하고잘못된 지성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악의를내보이는 인간, 결코 싸움과 증오, 타인에 대한 오만이라는 경솔한 지성을 바꾸지 않는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외적으로 한 사람이 변한다고 한들 제대로 소통이 될 리 없다는 것을 더블오는 작중 "이해할 생각도 없고 변하지 않는인간들"을 통해 보여 주었음.
이오리아 슈헨베르그가 제창하는 것처럼 더블오는 인류의 끊임없는각성과 변화를 촉구하며 새로운 환경적 변화("다가올 대화"로 상징되는)에 적응하고 변화할 수 밖에 없다고 역설하고 있음.인류는 분명 변혁해야 하며 이것은 인류 스스로 경험하여 단순히 한 사람 뿐만이 아니라 인류 모두가 분쟁의 끝을 맺고외우주라는 새로운 환경에 나가기 위해선 변혁해야 한다는 메시지. 더블오는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경험한 소년병마저 변화할 수있고 변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세츠나의 변혁과 상호간의 대화, 그리고 닐 디란디 이후 세츠나의 멘토가 된 마리나를세츠나가 진정 상호 이해하는 엔딩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
그렇기에 더블오 극장판의 부제는 이런 세츠나의 각성을 구세주인Savior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한계, 인류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에 도달하는 개척자, 선구자, 선지자Trailblazer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소년병으로서 극도로 자아가 왜곡되고 그저파괴자로서 살아갈 뿐인 소년이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애쓰고 결국 타인과 타인의 마음을 이어주는 자로서 변혁에 성공함으로서인류가 스스로 변혁하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람"이 되었기 때문임. 인간성 파괴의 극단을 보여주는소년병이라는 입장에서 시작해 결국엔 그런 사람조차 변화할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이것이 세츠나 F 세이에이가소년병으로서 설정된 이유고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자신의 변화를 힘겨워하고 고민하는"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이유라고 할 수 있음. 더블오 극장판 마지막 장면에서 신인류 세츠나와 구인류 마리나가서로의 이해를 확인하는 장면도 세츠나가 "인간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임.
인간의 의사소통은 이런 방식으로 시작됨. 각기 다른 주체가 동일한경험을 하면서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기원임.(물론 너무 자아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 역시 자기와 타자를 잇기 어려우며 소통의 어려움을 남기기도 함. 결국가장 중요한것은 올바른 지성, 자아의 성숙과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들어 더블오 TV판에서부터 보여주었던 인간들의이해관계 대립, 극장판 극중에 존재하는 각종 정치적 대립이나 서로간의 이해가 대립하는 장면들은 인간들은 그저 하나의의견에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음.
ELS는 군체 생명체였기에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다른생명체를 만나서 그저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려 했고 결국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다가 인류와 접촉하게 됨.(인류측의 입장에서 보면) "강압적으로" 자신의 대화를 강요하며 자신들의 방식을 강제한 것은 인류측이 아니라 ELS인것이 사실이며 인류는 거기에 대응해 싸움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그래도 한줄기 희망으로 ELS의 대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사실을 알리고 마지막까지 대화를 선택하여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알리려 시도한다거나 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인 것일뿐임 인류는 마치 유년기의 끝 마냥 미지의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체를 지키기 위해 싸움과 동시에그들과 대화를 시도 함으로써 진정한 이해를 달성하려 함.(유년기의 끝과 더블오가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 가운데 하나다.인류가 미지의 존재와 하나가 되어 지구를 박살내고 우주로 떠나는 결론을 낸 유년기의 끝과 달리 더블오의 엔딩에선이노베이터로 진화했지만 각각의 개체로서 남은 인류가 인류의 모습을 유지한채 우주로 떠남)결국 인류와 ELS의 최초 이해는서로가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것을 말살하지 않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며ELS와의 이해는 모두가 단일존재가 됨으로써 이해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끊임없이 어쩔땐 대립하기도하고 어쩔땐 타협하기도 하면서 어찌보면 사소한 것을 통해 성립되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음.
본작에서 세츠나와 티에리아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는 잘못된 지성으로인한 오해와 의심, 그로 인한 거짓과 구분을 넘어서 서로 다른 상호간의 공통점을 찾고 이해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보여준다. 인류와 ELS는 서로 경솔한 지성을 가지고 상호 이해를 어긋나게 만든다. ELS는자신들만의 이해를 고집하여 인류를 흡수하려 했고, 인류는 ELS와는 서로 이해를 못하는 종족이라고 여겼으며, 그렇게여기기에 대화를 포기하고 싸움을 선택하게 만든다. 상호이해에 있어서 진짜 장애물은 잘못된 지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싸움을반복하는 일이며, 타자를 그르게 인식하는 경솔한 지성이야말로 싸움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엔 인류와 ELS가 한송이꽃으로 상징되는 "평화를 원하고 서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통해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합치되어 평화를 맞을수 있었던 것처럼타자와의 상호 공감과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올바른 지성을 가지도록 변하는 것이야말로 싸움을 멈추는 방법이 된다고 주장하는것임.
다시 말해서 ELS는 "잘못된 지성을 가지고 서로 이해하려 한잘못을 되풀이하는 존재"로서 구상되었다고 할 수 있음. 우리는 흔히 서로 상호이해하는 것을 "하나가 됨으로써 상호 이해가이루어진다" 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음. 그러나 진정한 이해는 자신과 다른 타인의 존재를 존중하면서 타인의 생각을받아들여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낼 수 있는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때 성립될 수 있는 것임. 그저 타인이 어찌 생각하건 말건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던지,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이해방식이라고 볼 수 없으며 서로 다른개인으로 존재하면서도 서로의 의견을 이해하려고 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면에서 ELS 퀀터에 꽃이 자라나는장면은 자신 이외의 것을 흡수해서 자기와 똑같이 만드는 것으로만 상대방을 이해를 하려했던 ELS도 스스로가 바뀌는 것으로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함.
또한 ELS와의 대화 과정은 결국 어떤 의지를 가지고 소통하느냐의문제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함. 끊임없이 ELS와 대화하고 그들을 이해하려 시도했던 세츠나와 그들의 생각이"절규"임을 이해하고도 그를 거부하고 싸움을 선택한 데카르트를 보여줌으로써 소통한다고 다 만능이 아니라 어떤 의지로소통하느냐가 문제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음. 데카르트의 예에서도 볼 수 있지만 TV판에서도 인간들끼리 GN 입자를통해, 혹은 서로간의 교류를 통해 이해하고도 싸웠던 것은 서로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거나 설령 서로를 이해했어도 자신이가진 에고와 입장 때문에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충분한 상황, 혹은 상호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음.
즉 더블오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뉴타입처럼 독전파만 내뿜는다고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임, 그전에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상호 이해를 위해 인간으로서 근본적으로 변혁해야한다는 메시지이며 스스로의 의지로 지속적인 상호간의 소통, 대화와 공감의 의지를 가지고 서로 이해하더라도 싸움을 낳는각자의 에고, 믿음, 선입견을 넘어서 상호간의 공감을 끊임없이 가져야만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임.